최호열의 <포천시 지명유래 12> 금주리

오늘은 일제 시대 때 전북 김제와 함께 일본인이 금을 채굴해 간,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포천의 '금주리'에 대한 지명 유래를 소개하고저 한다.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에 소재한 '금주리'는 영중면의 6개 법정리 중 하나이다.

금주리에 대한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영평현에서 동쪽으로 2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주리 동쪽에 위치한 금주산(높이 568m)은 일제 강점기에 '영중 광산'이라고 하는 금광이 있어 반세기 동안 금을 채굴해 갔다. 해방 후에도 '금주 광산'이란 상호로 1980년대 후반기까지 금을 채굴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광산을 개발하면서 마을 이름을 '금주리'라고 하였다.

금주리란 마을의 형성과 변천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1912년 행정 구역은 영평군 군내면 만교리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군내면 수일리 전역과 거사동 일부, 포천군 신북면 만세교리 일부를 병합하고 영중면에 편입하였다. 그 후 2003년 10월 19일 포천군이 도농복합시로 승격하면서 지금의 포천시 영중면 금주리가 되었다.

금주리는 금주산의 북서쪽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계곡부인 중앙부에 '금주 저수지'가 있다. 금주산의 여러 지류로부터 금주 저수지와 연결 된 '수일천'이 금주리의 중앙부를 지나 서쪽 경계를 나타내는 '명덕천'으로 흐르고 있다.

포천시의 지명 유래에 지식이 해박한 고 이현문 선생에 의하면 '금주산’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고 말했다.

"옛날부터 ‘금주산’에는 ‘아주 큰 금이 아홉 덩어리가 묻혀 있는데 꼭 아들을 아홉 명 둔 사람이야만 그 금을 캘 수 있다고 해 아무나 그 금을 캘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이 동네는 원래 ‘수일동'이라 한다. 물 水자, 날 日자 해서 ‘수일동’인데, 물이 항상 가득해서 ‘수일동’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일동’을 그냥 머리자만 따서 ‘무나리’라고도 했다. 저수지 있는 동네를 옛날부터 ‘무나리(현재 금주2리)’, 또는 ‘무내리’라고 부른다."라는 설이 지금껏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말했다.(이현문 선생: 화현면 출신, 2019년 88세 별세)

우리 포천시의 금주리는 금을 채굴했던 곳으로 아주 소중한 곳이다. 이곳을 '금 채굴 체험장'과 함께 관광지로 잘개발한다면 광명시의 '광명 동굴'처럼 한국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최호열/ 포천신문 회장, 전 민주당 포천.가평 지역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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